간략한 요약
이 비디오는 일본 나가사키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이룬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탐구합니다. 나가사키는 쇄국 정책 하에서도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의 발전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수용했으며, 이는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 나가사키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본의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 데지마는 쇄국 정책 하에서 서양과의 유일한 교역 창구였습니다.
- 나가사키는 일본 근대화의 주역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나가사키 소개
나가사키는 일본 서쪽 끝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일본이 다른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낸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 도시는 일본의 전통적인 모습과 외부 세계와의 교류가 혼합된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가사키는 과거 서양 문물을 처음으로 받아들여 일본 전역에 전파한 관문이었습니다.
나가사키 쿤치 축제
10월의 나가사키는 축제 분위기로 가득하며, 특히 370년 전통의 나가사키 쿤치 축제는 어부들의 고기잡이 공연과 전통 놀이, 춤판으로 도시 전체를 들썩이게 합니다. 이 축제는 일본, 중국, 서양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국제성을 보여주며, 나가사키가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교류해 온 국제 도시임을 상징합니다.
글로버 정원과 나비 부인
19세기 개항기 모습을 간직한 글로버 정원은 나가사키 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푸치니 오페라 '나비 부인'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글로버 정원의 서양식 저택은 나비 부인의 모델이 살았던 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우라 다마키의 동상은 나비 부인 역할을 2000회 이상 연기하며 일본을 서양에 알리는 데 기여한 그녀의 업적을 기립니다.
데지마: 쇄국 시대의 창
나가사키 항 바로 옆에 위치한 데지마는 19세기 개항 전까지 일본에서 서양에 열린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1636년에 건설된 인공 섬인 데지마는 네덜란드 상인들과의 무역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데지마는 일본 관리들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네덜란드 상인들의 활동은 섬 안으로 제한되었습니다.
포르투갈과의 만남과 조총
포르투갈 상인들은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 문물을 일본에 전파했으며, 특히 조총은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네가시마 영주는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조총을 구입한 후 자체 생산을 시도했으며, 이는 일본의 군사 기술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조총은 전국 시대의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나가사키의 특산물: 유리 공예와 카스텔라
나가사키에는 포르투갈과의 교류 흔적이 담긴 특산물이 남아있습니다. 아름다운 유리 공예품은 포르투갈에서 유래되었으며, 카스텔라는 포르투갈 빵을 모방하여 만든 나가사키의 대표적인 빵입니다. 카스텔라는 400여 년 전 포르투갈 문화를 만나 일본인들의 열정이 담겨 있는 음식입니다.
기독교 탄압과 은둔
1570년, 일본은 서양 문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가사키를 개방했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를 탄압하고 나가사키에서 기독교인들을 처형했으며, 이는 기독교 신자들이 숨어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교의 여래상과 불상을 변형시킨 성모 마리아와 예수상이 등장한 것은 감시를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운젠 지옥 온천과 기독교 순교
나가사키 운젠에 위치한 운젠 지옥 온천은 에도 막부 시대에 기독교 신자들을 처형하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어간 고통과 비명의 땅이었으며, 한때 포르투갈 예수회에 내준 기독교의 땅이었던 나가사키는 탄압의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네덜란드와의 교역과 데지마의 역할
에도 막부는 기독교 전파를 막기 위해 포르투갈인을 일본인과 격리시키는 인공 섬 데지마를 건설했습니다. 1637년, 포르투갈인들은 데지마에서도 추방되었고, 이후 네덜란드가 데지마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218년간 일본과 독점 무역을 했습니다.
하우스텐보스와 네덜란드 상관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하우스텐보스가 있습니다. 이곳은 일본 속의 유럽으로 불리며, 네덜란드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 상관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네덜란드 연합 동인도 회사는 세계 곳곳에 거점을 두고 일본과 중계 무역을 했습니다.
시볼트와 근대 의학
나가사키에는 일본 근대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볼트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유적이 있습니다. 시볼트는 데지마에 파견된 네덜란드 상관의 주치의였으며, 일본인들에게 서양 의학을 가르치고 의술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일본 근대 서양 의학을 이끈 주축이 되었습니다.
에도 참부라와 난학
에도 막부는 1년에 한 차례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을 불러들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일본 전역에 근대화된 서양 문화와 학문을 전파했습니다. 에도 참부는 일본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문명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으며, 난학 열풍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난학은 의학에서 시작되어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었으며,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게이오 대학
일본의 명문 사학인 게이오 대학은 난학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했습니다. 그는 일본이 구미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문명 개화의 길을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고 역설하며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의 여명을 연 사상가로, 그의 배움 또한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가사키: 일본 근대화의 진원지
나가사키는 일본 열도에서 작은 항구 도시였지만, 데지마를 통해 서양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고 국제 정세를 파악했습니다. 쇄국은 하되 일본의 발전에 필요한 서양 문명을 받아들였던 일본의 실리주의는 나가사키를 통해 드러납니다. 나가사키는 일본 근대화의 여명을 열었던 곳이며, 일본 최초의 사진관과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배출한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