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요약
이 비디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현재 진행 중인 전쟁의 역사적 배경과 원인을 분석합니다. 키예프 루스 시대부터 시작하여 두 나라의 복잡한 관계, 몽골 침략,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향, 러시아 제국의 확장, 소련 시대의 홀로도모르, 크림 반도 합병, 돈바스 지역 분쟁, 나토 확장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봅니다. 또한 푸틴 대통령의 관점과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책,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반응을 분석하여 현재의 위기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복잡한 역사적 관계
- 현재 전쟁의 원인과 배경
- 푸틴 대통령의 관점과 전략
- 국제 사회의 반응과 영향
소개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전 세계의 주요 이슈이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쟁점입니다. 이 사건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뒤흔드는 대사건으로, 유럽의 강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일상을 빼앗기고 비극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현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쟁 영상을 보면서 전쟁의 현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전쟁 시작 후 가족들이 우크라이나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금기어가 되었으며, '특수 군사 작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정권은 나치 정권으로 간주되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킨다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현대전의 특징은 민간인 피해자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국제사회는 러시아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산 제품에 대한 수입을 중단하고 글로벌 기업들은 러시아에서 영업을 중단하거나 축소하고 있습니다. UN은 러시아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식 비난했습니다.
우크라이나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를 공격하는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크라이나가 어떤 나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 바구니라는 별칭이 있으며, 세계 최대 밀 수출국 중 하나입니다.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철광석, 티타늄 같은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많은 강대국들이 탐내는 땅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한데, 북쪽과 서쪽으로는 유럽,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아시아, 남쪽으로는 중동과 만나는 곳입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서방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로 반드시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놓아야 할 곳입니다. 러시아 GDP의 1/3이 에너지 분야에서 벌어들이는 돈인데, 주요 가스관 대부분이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지나서 유럽으로 가고 있습니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향권에서 벗어난다면 러시아는 경제적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푸틴과 젤렌스키의 연설
푸틴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각자 자기 나라의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러시아 국민들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친척이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키예프 루스
러시아가 말하는 두 나라의 혈연관계 시작점은 9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두 나라의 기원이 되는 나라는 키예프 루스라는 나라였습니다. 키예프 루스는 오늘날 키예프를 중심으로 동슬라브인 3명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동슬라브 최초의 국가입니다. 키예프 루스는 비옥한 토지와 교통의 요지로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에서 선진 문물과 동방 정교를 받아들여 당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국가의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키예프 루스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의 기원이 됩니다.
몽골 침략
13세기에 일어난 결정적인 사건으로 인해 키예프 루스가 역사적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13세기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가 1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키예프 루스를 공격하고 정복했습니다. 이때 키예프 루스가 강력한 몽골 제국의 공격을 받고 허물어지고,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각각 갈리게 됩니다.
모스크바 공국과 코사크
몽골 제국의 지배에서 자체 힘을 길러 동슬라브인을 이끄는 큰 나라가 모스크바 공국입니다. 모스크바 공국은 오늘날 러시아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우크라이나가 되는 땅은 주변 여러 나라가 노리는 지역이 됩니다. 14세기부터는 동유럽의 강자로 떠오른 리투아니아가 침입했고, 16세기에는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와 함께 우크라이나 땅을 차지했습니다. 폴란드의 압박을 피해서 남쪽으로 밀려 나갔던 농민 전사들을 코사크라고 부릅니다. 코사크는 폴란드에 대항했지만 혼자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동방 정교를 믿는 이웃 나라 모스크바 공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페레야슬라프 조약
우크라이나의 코사크는 러시아와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을 맺은 뒤 우크라이나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러시아가 약속을 깨고 폴란드와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우크라이나 땅을 폴란드와 나눠 가집니다. 이 조약은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당시 러시아에 합병되었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단기적인 군사동맹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우크라이나 분열
니프로 강을 기준으로 서쪽 땅은 폴란드 차지가 되고 동쪽은 러시아 차지가 됩니다. 우크라이나의 코사크는 두 나라의 무력에 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18세기에 우크라이나 남쪽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이를 근거로 우크라이나는 원래 러시아의 일부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건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은 강한 친서방 성향과 함께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고, 동부와 남부 지역은 친러시아 성향이고 러시아어를 상용하는 인구가 많아 지금까지도 두 문화권으로 나뉘어 살고 있게 된 계기가 됩니다.
폴란드 분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땅에서 더 진출할 기회를 얻으려고 했고, 폴란드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만들지 못해 힘이 떨어져 갔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러시아 이 세 나라가 폴란드 땅을 세수로 쪼개 나눠 가집니다. 1772년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가 원래 차지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땅까지 차지했고, 1793년, 1795년에 두 차례 걸쳐서 더 폴란드를 나눠가지면서 영토가 확장됩니다. 페레야슬라프 조약 이후 약 200년 넘게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게 됩니다.
우크라이나 독립
1917년에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게 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뜻밖의 독립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정치 세력이 1917년 11월에 우크라이나 최초의 독립국 우크라이나 국민 공화국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이 독립의 설렘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뒤에 사회주의 세력이 직권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우크라이나 독립국 성립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독립을 염원하는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세력은 독립을 위해 1918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영국, 프랑스에게 패하면서 독립 시도는 실패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우크라이나는 사회주의 세력이 이끄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지고, 1922년 말에 결성된 소비에트 연방의 초창기 회원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뒤로 70년을 연방 체제 안에서 같이 지냈습니다.
우크라이나 나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유는 우크라이나의 나치입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러시아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홀로도모르
반러시아 감정을 추적하다 보면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사건인 소련 시절의 홀로도모르를 알아야 합니다. 우크라이나는 당시 소련의 식량 생산을 1/4 정도 책임지고 있었지만, 소련은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발돋음하려고 무리하게 집단 농장 체제를 도입합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저항했지만 소련의 중앙정부가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급격하게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지고 자연재해까지 겹쳐 우크라이나 지역에 엄청난 대기근이 닥쳤습니다. 이때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 쥐, 벌레, 나무껍질까지 먹었고, 심지어 사람고기를 먹는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유엔은 그때 굶어 죽었던 우크라이나 사람이 700만 명 내지는 1,000만 명이 될지도 모른다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단
소련 중앙정부의 정책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치솟던 상태에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을 몰래 추진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강제하는 세력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단입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단은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우크라이나의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들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땅에 오로지 우크라이나인들로 구성된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치 독일 협력
1940년대 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단은 소련으로부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나치 독일군과 협력합니다. 1941년에 나치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고, 이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단이 나치가 해야 할 일을 대신 수행합니다. 우크라이나 땅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단은 독립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우크라이나 땅에 있는 소수민족, 특히 유대인들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스테판 반데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상임 회의를 열면서 스테판 반데라를 언급했습니다. 스테판 반데라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단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나치의 반소련 정책에 동조하면서 순수한 우크라이나인의 단일 민족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못살게 군 다른 민족을 다 쫓아내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반데라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유대인은 물론이고 폴란드인 10만 명을 넘게 죽였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크림 반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소련군은 우크라이나에 있던 나치 독일군을 몰아냈지만,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던 반소련 의식과 소수민족 학살로 우크라이나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소련은 우크라이나의 민심을 바로잡고 달래줄 선물이 필요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크림 반도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땅이라고 봤습니다.
크림 반도의 역사
크림 반도는 18세기말 러시아 제국의 땅이었지만, 몇몇 인물들에 의해서 우크라이나 땅이 됩니다. 푸틴 대통령은 연설에서 레닌, 스탈린,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늘려 줬고, 오늘날의 우크라이나가 그 땅 그대로 독립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에 영토를 넘겨 준 이유는 행정 편의상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차피 소련이라는 체제가 하나였기 때문에 러시아 관할 구역을 우크라이나 관할 구역으로 넘겼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련 붕괴와 크림 반도
1991년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15개 공화국이 자다 독립을 맞이합니다. 이때 우크라이나도 소련이 넘겨줬던 크림 반도 함께 독립을 맞이합니다. 러시아는 처음부터 크림 반도를 달라고 요구하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유로서 크림 반도가 중요해졌습니다. 특히 세바스토폴이라는 항구는 예로부터 중요한 핵심 군사 시설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협상을 버려 2042년까지 세바스토폴에 러시아 해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협상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크림 반도는 전체 주민 200만 명 중에 60% 이상이 러시아계 사람들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크림 반도 합병
2014년 러시아는 2042년까지 주둔한다는 협상을 깨고 크림 반도를 점령해 버립니다. 러시아군은 무장 병력을 투입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서 크림 반도를 러시아에 합병해 버립니다. 러시아는 크림 반도에 진입할 때 러시아 국기와 계급장을 떼고 위장하면서 국제 사회 비난을 피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크림 반도 합병을 환영하며 푸틴의 지지율도 많이 올라갔습니다.
크림 반도 콘서트
푸틴 대통령은 크림 반도 병합 8주년 콘서트를 열어 러시아 국민 20만 명 앞에서 크림 반도가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러시아는 대량 학살을 막기 위해 크림 반도를 병합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유럽 연합과 미국은 여전히 크림 반도와 러시아가 합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돈바스 지역
크림 반도에 이어서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을 요구하고 나선 곳은 러시아 국경지대에 인접한 우크라이나의 영토 돈바스 지역입니다. 돈바스 지역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인구 400만 명 가량이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최대 광공업 지대 중에 하나고 우크라이나 안에서 GDP 1/5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2014년 이곳에서 크림 반도처럼 독립을 요구하면서 나섰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바스 분쟁
돈바스 지역은 이번 전쟁 전에도 두 나라간 분쟁에서 빠질 수 없는 요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돈바스 지역이 우크라이나 군에 의해서 학살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공격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레닌과 스탈린의 정책
레닌은 민족 자유주의라는 원칙을 내세워서 소련 안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자치권을 허용하고 당시 우크라이나 동남쪽 일부를 우크라이나에 붙여 줍니다. 레닌이 죽은 다음에도 민족 자결주의 사상에 따라서 토착화 정책을 시행합니다. 1926년, 1927년에 걸쳐서 우크라이나의 정부 직원들과 공산당원들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채우기 시작합니다. 소련의 첫 지도자였던 레닌은 우크라이나의 자율성을 키워주려고 했지만, 그 뒤에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자율성을 확 줄여 버립니다.
돈바스 공업화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소련 산업의 핵심 지역으로 키우려고 했습니다. 제1차 5개년 계획 1929년부터 1930년대 초에 소련 전체 1,400곳에 공장을 세우는데 400개 공장을 바로 우크라이나에 지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강에 엄청난 규모의 수력 발전소를 세웠고, 당시에는 유럽 최대의 규모였습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동부를 소련 전체의 공업지역으로 만들려는 목표를 세웠고, 그 결과 우크라이나 동부에 있는 공업도시로 러시아인 200만 명이 이주합니다. 그래서 이곳 인구의 30%가 러시아 주민들이고, 러시아 말이 더 많이 쓰이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친러시아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 되었습니다.
돈바스 내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에 공업도시로 활발했던 돈바스 지역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의 친러시아 세력에게 같은 러시아라는 이유로 기회를 주고 경제적인 지원을 시작하니까 러시아의 보호 아래 내전을 일으켜서 독립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리 땅인데 거기서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부군을 투입하고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말레이시아 항공 격추 사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들은 시청과 정부 청사를 점거한 뒤에 민병대를 조직해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대치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2014년에 이 지역을 말레이시아 여객기가 지나고 있었는데 미사일이 발사돼 비행기가 격추되었습니다. 국제공동 조사단이 조사를 했더니 독립을 하려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만든 반군 세력이 쏜 러시아제 미사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러시아의 입장
러시아 입장은 돈바스에 없었고, 가쪽 력을 지원한 적도 없고, 러시아 무기도 없다는 것입니다. 돈바스 지역도 크림 반도처럼 러시아로 합병되는 것과 유사하게 진행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5년에 독일, 러시아, 프랑스, 우크라이나 계국 정상이 모여서 국제적인 군사적인 분쟁을 끝내고 그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 합의를 맺었습니다. 2019년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 주민 80만 명에게 러시아 여권을 발급해 줍니다.
돈바스 독립 승인
2022년 2월 21일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에 만들어진 두 개의 자치 국가를 승인하면서 우크라이나로부터 돈바스 지역 분리에 동의합니다. 평화 유지를 하겠다는 명력을 내세워서 러시아군이 이 지역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각각의 자치과 러시아 사이의 우호 조약이 체결되면서 병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토와 유럽 연합 가입 저지
러시아는 8년 전부터 크림 반도와 돈바스 지역에 무력 행사라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했을까요? 바로 나토와 유럽 연합 가입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와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상황을 어떻게든 막겠다는 것입니다.
나토와 유럽 연합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 경제 안정을 누리면서도 회원국간의 협력이 가능해지면서 평화 유지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나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사회주의였던 소련이 서유럽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해서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군사 조약 기구입니다. 가입 국가 중에 한 나라라도 공격을 받으면 다른 국가들이 회원 국가들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그 나라를 지켜준다고 하는 안보 기반을 다질 수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나토 동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에 1990년에 미국이 소련과의 조약에서 나토가 더 이상 동쪽으로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나토의 동진은 계속 진행이 되고 푸틴은 계속 여기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나토는 베를린 장벽을 기준으로 한 동진을 이야기한 것이지 전 국가를 모든 국가를 상대로 동진 금지를 약속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을 해버리면 나토의 주둔 지역하고 모스크바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게 됩니다. 나토의 중심인 미국이 동유럽으로 확장하는 국제 전략에 러시아가 엄청난 위협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푸틴의 경고
푸틴 대통령은 연설에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을 해서 크림 반도를 찾으려고 한다면 나토가 무서운 보복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핵무기 사용을 염두에 둔 협박에 가까웠습니다.
우크라이나 독립과 핵무기
1991년에 소련에서 탈퇴한 우크라이나에서 나토 가입 여부에 민감한 이유가 시작됩니다. 독립했을 당시만 해도 우크라이나의 기대가 컸습니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영토도 크고 농사 잘 되기로 손꼽히는 토양인 데다가 소련 시절에 군수 물자 생산의 3~40% 감당했을 만큼 우크라이나 안에서 군수 산업이 발달했고, 세계 제5위의 군사력을 갖춘 채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에서 많은 핵무기를 생산했는데 그 상당수가 우크라이나에 집중 배치돼 있었습니다. 독립을 하고 보니까 얼결에 세계 3위 핵무기 보유 국가로 손꼽힐 정도로 핵무기가 많았던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경제 위기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계획 경제 체제 아래에서 한 번도 독자적으로 경제 활동을 해봤던 경험이 없었습니다. 경제제도와 관리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독립을 하게 된 것입니다. 1993년 한 때에는 인플레이션이 무려 1만% 달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에는 GDP 전년 대비 36%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경제를 일으켜야 할 정부가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거대 구경 기업체 있던 가스, 석유, 식료품 등이 알짜배기 기업을 경제 권력층에 기생하던 소수 경제인들이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크라이나가 하루 아침에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부다페스트 각서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관리할 능력과 경제적인 여력이 없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거보다 팔아버리는 게 더 경제적이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다급하게 제동을 걸었습니다. 1994년에 핵무기 폐기를 결정하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모여서 미국, 러시아, 영국, 우크라이나가 모여서 각서를 체결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가 핵확산 금지 조약에 가입하고 핵무기를 제거한다면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독립, 주권, 국경선을 존중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 사용을 자제하고, 우크라이나에 핵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친서방 vs 친러시아
우크라이나가 핵무기 폐기를 결정하고 나토 가입을 추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됩니다. 우크라이나 안에서는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우크라이나는 동부와 서부의 성향이 다르다는 말씀을 드렸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과거에 맺었던 페레야 조약 이후로 우크라이나는 동부와 서으로 친서방 세력과 친러시아 세력으로 나뉘었는데, 이것은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2대 대통령 레오니트 쿠치마 대통령은 동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성된 친러시아 성향의 대통령이었습니다.
푸틴의 등장
2000년에 들어서는 러시아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첫 등장이 이루어집니다. 강한 러시아를 건설하겠다는 푸틴의 목표에 우크라이나의 쿠치마 대통령도 러시아의 손을 잡으면서 두 사람의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 나갑니다. 푸틴의 직권이 시작되면서 우크라이나 안에서도 친서방 세력과 친러시아 세력이 맞부딪치면서 끊임없는 갈등의 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셴코와 야누코비치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한 두 명의 대통령 선고 후보가 등장하는데, 친서방 성향의 후보 유셴코, 친러시아 성향의 후보 야누코비치였습니다. 결국 친서방 세력인 유셴코가 당선이 됩니다. 친서방 세력 있던 유코는 당선 이후에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유럽 연합 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을 했는데, 우크라이나의 정치가 급격하게 친서방 성향으로 기울이니 러시아가 대대적인 경제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가스관 분쟁
소련이 붕괴된 다음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가스관 망 사용료를 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는 지난날 소련에 속했던 나라의 한에서는 상대적으로 싼값의 가스를 공격하면서 안정적인 가스관 사용을 지속하고 있었는데, 우크라이나가 친서방 성향으로 기울어지니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중단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 싸움에 승자는 러시아였습니다.
야누코비치 당선
러시아의 경제 압박에 우크라이나의 경제가 휘청하고 시작하면서 다음 대선에 승자는 친러시아 세력인 야누코비치에게 돌아갑니다.
유로마이단
친서방 세력이 결정적으로 어떤 사건을 맞이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주류로 떠오르게 됩니다. 2013년에 이유 가입을 연기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야누코비치는 경제 부흥을 위해서는 이유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 받는 조건으로 강력한 구조 조정을 해야 하고, 러시아에서는 50억 달러를 조건 없이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통크게 했습니다. 야누코비치는 우크라이나의 이익에 따라서 이유 가입을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유럽 연합 가입을 기대했던 우크라이나의 국민들과 그동안 움츠러 들었던 친서방 성향의 국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로마이단이라는 사건입니다.
야누코비치 퇴진
무력으로 진압을 하니까 무장대가 키예프 의회를 점거하면서 야누코비치 퇴진을 외쳤습니다. 결국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젤렌스키 대통령
친러시아 세력 대통령의 유럽 연합 가입 포기로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지고 대통령이 교체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더 이상 이런 갈등이 없는 대통령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이 와중에 이러한 분쟁을 끝내겠다고 공약을 내거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원래 배우이면서 코미디언 출신입니다. 국민들을 지지를 받으면서 정치인으로 변신을 했는데 젤렌스키는 정당의 이름도 새로운 이름으로 시도합니다.
국민의 종
젤렌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