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요약
이 영상은 무신정권 이후 삼별초의 항쟁에 대해 다룹니다. 1270년 몽골과의 강화에 반발하여 시작된 삼별초의 항쟁은 진도와 제주도로 이어지며 3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영상은 삼별초의 반란과 항쟁 사이의 평가 문제, 그들의 군사적 특징, 그리고 이들이 고려 민중에게 미친 영향 등을 분석합니다.
- 삼별초 항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
- 삼별초 군대의 성격과 규모
- 고려 민중의 호응과 대몽항쟁으로의 확산
- 몽골의 전략과 삼별초의 외교적 시도
- 삼별초 항쟁의 역사적 평가와 오키나와 이동설
무신정권과 삼별초의 등장
1270년, 고려는 몽골과의 강화 조건으로 개경 환도를 결정합니다. 이에 반발한 삼별초는 군대를 일으켜 항쟁을 시작합니다. 삼별초 항쟁은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3년간 이어집니다. 과거에는 민족을 지키기 위한 구국항쟁으로 평가받았으나, 이 영상에서는 삼별초 항쟁의 실체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니다. 윤용혁 교수의 저서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삼별초"를 참고하여, 삼별초 항쟁의 다양한 측면을 분석합니다.
삼별초의 반란과 남하
1270년 6월 1일, 배중손과 노영 등이 삼별초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들은 강화도의 재물을 싣고 남쪽으로 이동하는데, 강화도에서 진도까지 두 달 반이나 걸린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이 제기됩니다. 무신정권의 마지막 권력자였던 임유무가 죽임을 당한 후, 삼별초는 몽골과의 화친에 불안감을 느끼고 재물을 풀어 민심을 얻으려 합니다. 원종은 삼별초를 설득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삼별초는 태조 왕건의 초상화를 앞세워 강화도를 떠납니다.
삼별초의 군사적 특징과 규모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특수 군대였으며, 그 규모는 대략 4~5천 명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일반 군인과는 달리 정권 보위를 위한 특수 임무를 수행했으며, 높은 녹봉과 사적인 은혜를 받는 등 특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권력자들은 삼별초를 사병처럼 활용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했고, 삼별초 군인들은 권력 투쟁에서 이기는 편에 서서 출세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4천여 명의 삼별초 군대가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승화후 왕온 옹립과 남천
삼별초는 개경의 국왕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왕(승화후 왕온)을 세웠으며, 이는 반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왕온을 옹립하고 관청을 설치하여 독자적인 조정을 구성했습니다. 당시 "용손 12진"이라는 참언이 돌면서 삼별초의 남하를 정당화했고, 이들의 남쪽 이동은 남천(南遷), 즉 남쪽으로의 천도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삼별초는 천 척이 넘는 배를 이끌고 남하했는데, 배 한 척당 평균 15명 정도가 탑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강화도의 혼란과 민심
삼별초가 남하할 때 강화도 주민들은 개경으로 돌아갈지, 삼별초를 따라 남쪽으로 갈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몽골의 힘을 두려워하여 개경행을 택했고, 삼별초는 몽골군의 살육을 경고하며 사람들을 모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삼별초는 출입을 금지하고 배에 타지 않으려는 양반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남하시켰고, 이에 저항한 정문감은 부인과 함께 바다에 투신했습니다. 삼별초를 따라 남하한 이들은 주로 평민 이하 계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별초는 남하 전에 호적 자료와 노비 문서를 불태워 하층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습니다.
진도 도착과 항전 거점 마련
강화도를 출발한 삼별초는 두 달 반 만에 진도에 도착합니다. 항전 중심지를 찾기 위해 늦어졌다는 추정과 제주도로 향하려다 전략이 수정되었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진도는 당시 고려의 해상 교통 요충지였으며, 최우의 아들 만전이 주지로 있던 용장사가 있어 무신정권과도 연관이 깊었습니다. 삼별초는 진도에 용장성을 쌓아 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나주와 전주를 공격하며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려 시도합니다. 또한, 제주도를 장악하여 배후 기지를 확보합니다.
고려 민중의 호응과 삼별초의 확산
삼별초의 항쟁에 고려 민중이 호응하면서 항쟁은 더욱 확산됩니다. 밀성군(현재의 밀양)에서는 삼별초에 호응하기 위해 지방관을 죽이고 봉기했으며, 개경에서는 몽골 다루가치를 죽이고 진도로 투항하려는 계획이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대부도에서는 몽골군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는 등, 고려 민중은 몽골에 저항하며 삼별초에 힘을 보탰습니다. 이러한 민중의 호응은 삼별초 항쟁의 성격을 단순한 반란에서 대몽항쟁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고려 조정의 미온적 대응과 몽골의 전략
고려 조정은 삼별초 진압을 위해 김방경을 역적 추토사로 임명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군사는 60명에 불과했습니다. 김방경은 몽골군과 연합하여 삼별초를 추격하지만, 몽골군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전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합니다. 몽골은 삼별초를 진압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고려의 방어 시설을 파괴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몽골은 삼별초와 협상을 시도하며 시간을 벌었고, 삼별초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항몽 연합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진도 함락과 제주도 항쟁
몽골은 전략을 수정하여 6천 명의 병력을 고려에 보내고, 고려군 6천 명과 함께 진도를 공격합니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진도는 함락되고, 배중손은 전사하며 김통정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제주도로 후퇴합니다. 홍차구는 승화후 왕온을 죽이고 진도를 약탈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자행합니다.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겨간 삼별초는 항파두성을 쌓고 방어에 힘쓰며, 전라도 연안 지역과 충청도, 경기도 서해안까지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재개합니다.
제주도에서의 최후 항전과 삼별초 항쟁의 종결
제주도로 옮겨간 삼별초는 전라도 연안 지역을 공격하고, 충청도와 경기도 서해안까지 진출하여 개경을 위협합니다. 또한, 경상도 남해안을 공격하여 몽골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몽골은 제주 삼별초가 남송과 연결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회유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1272년 11월부터 제주도를 공격합니다. 1273년 4월, 몽골-고려 연합군에 의해 제주도가 함락되고 김통정은 한라산으로 후퇴합니다. 김통정은 몽골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로써 3년 1개월에 걸친 삼별초의 항쟁은 막을 내립니다.
삼별초 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
삼별초는 과거 반란으로 평가받았으나, 1930년대 이후 외세에 저항한 항쟁으로 재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삼별초 항쟁은 단순한 반란이나 항쟁으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초기에는 삼별초 군대의 생존을 위한 반란이었으나, 고려 민중의 호응으로 대몽항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삼별초 항쟁은 삼별초 군대의 반란과 고려 민중의 대몽항쟁이 결합된 복합적인 사건으로, 고려 민중의 대몽항쟁이라는 후자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별초의 오키나와 이동설
최근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이동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우라소성에서 발견된 기와에 "계유년 고려와장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이 기와가 만들어진 시기를 1273년(제주 삼별초 진압 해)으로 추정하여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라소성에서 출토된 연화문 수막세가 진도 용장성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는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하며, 다른 경로로 고려인이 오키나와에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삼별초의 오키나와 이동설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결론 및 추가 정보
삼별초 항쟁 이후, 몽골은 고려를 이용하여 일본을 공격합니다. 몽골은 제주도를 점령한 후 목마장을 설치하고 말을 키워 몽골로 가져갔으며, 원나라 마지막 황제가 제주도로 피난하려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몽골의 일본 공격은 태풍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몽골은 일본 점령을 포기합니다. 일본 공격 이유는 은이 많이 나는 나라라는 소문 때문이었다는 추측이 있습니다.